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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0.11 팩트풀니스 (FACTFULNESS)
  2. 2019.10.11 사피엔스
  3. 2019.10.11 몇 년간의 독서에 대하여
  4. 2019.10.11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2
  5. 2019.10.11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1
  6. 2019.10.11 의심
  7. 2019.10.11
  8. 2019.10.11 숨쉬듯 가볍게
2019.06.27
 
[비평] 우리가 속해 있지만 살고는 있지 않는 곳에 대한 이야기
 
결론부터 쓰자면, 우리가 세상의 어떤 부분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비난받을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작가가 했던 말을 빌리자면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으며
 우리는 그 안에서 배우고 알아야 할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독서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의 주변에만 관심을 쏟아도 부족할 지경이다.
때문에 생활의 지평선 너머의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그 자체로써 대단한 헌신적인 행위 일지도 모른다.
 
책 이야기로 넘어가자.
몇 장의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무지한 이국인들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늘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어떤 서양 노인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안타깝게도 노인은 썩 좋은 언변을 가지고 있진 않은 것 같다.
그는 대뜸 “너희들은 세상으로부터 잘 못된 정보를 얻고 있기 때문에 안 좋은 편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침팬지 보다 멍청한 것이다.”라고 윽박지른다.
서두에 썼듯 그 말에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내가 그의 언변에 안타깝다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그의 비난이 당신을 향한 배려나 세월의 지혜로움을 하나도 담고 있지 않은 날것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는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내가 세계의 어디를 가든 모두들 멍청하게 일을 하고 있으며 나는 그것을 알아차렸고, 사실적 데이터를 기반한 해결 방법을 찾아 그들을 계몽 시켰으며 많은 생명을 구했다.
내가 방문하지 않은 세계는 여전히 멍청하게 일하고 있으며, 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세계의 여러 기관이 나의 시각을 따를 것을 권한다.
’책의 깊이에 비해 꽤나 많은 두께를 차지하는 참조 문헌 섹션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여백이 이 무용담의 반복으로 채워져 있다.
 
사실 책의 큰 두 가지 콘셉트인 ‘통계적으로 제대로 사고하는 방법(사기당하지 않는 방법)’과
‘보건 분야의 세계적인 흐름(이 세상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보다 괜찮다는 것을 의미하는 지표들)'의 면에서만 보면 썩 나쁘진 않다.
문제는 위 두 가지 핵심은 매 챕터의 일부분, 그것도 대부분 마지막에 단 몇 줄로만 정리되어 있다는 것이며,
그마저도 나중에 다시 책을 뒤적여 볼 만한 인상적인 내용은 없었던 듯하다.
그렇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의미가 퇴색되어 버릴 데이터들만 잔재해 있는 이 책을 책장에 꽂아둘 필요가 있을까?
 
끝까지 이 책에 대해 아쉬운 점은 ‘상식과 상식이 아닌 것을 구분하지 않으며’, ‘모르는 것과 틀린 것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근사(approximately)하게 알고 있는 것과 근거 없는 추정’을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대중적으로 읽힐 만한 책은 아니라고 본다.
세상에는 더 친절하게 통계를 읽는 방법을 알려주고, 흥미로운 데이터를 보여주는 책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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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책/독서록 2019. 10. 11. 15:37
2019.05.21
 
과거에 인류가 이동했다.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숲에서 들판으로, 육지에서 바다로,
자연을 피해, 먹을 것을 찾아, 새로운 땅을 찾아.
 
생존경쟁에 딱히 뛰어날 것 없는 동물이었다.
그런데 인간은 생각했다. 공통의 목적에 대해 똑같이 상상할 수 있었고,
그 결과의 일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믿었기 때문에 협동을 통해 개인의 능력보다 점점 더 많은 것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 이를 통해 사피엔스라는 종(種)은 단순히 생물학적 진화를 거쳐온 다른 종과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이제 인류는 국가와 경제, 종교와 질서, 기술과 잉여 식량을 갖게 되었다.
인류는 또 이동을 시작한다.
종교적 신념을 전파하기 위해, 더 쓸모 있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이전과 이동하는 방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과거에는 피가 흐르지 않는 방향으로 이동했다면 이번엔 이동하는 방향을 따라 피가 흘렀다.
 
그리고 역사와 발길이 닿았던 방향으로 이동하는 시대가 끝이 났다.
지구는 둥글었고, 우리는 현실 위에 집단적 상상으로 쌓아 올린 사회에 정착했다.
이제 인류의 고민 방향은 좌우에서 상하로 바뀌었다.
지구를 탈출할 수 있는 속도를 계산하여 우주를 향해 날고, 우주만큼이나 미지의 영역인 해저의 지도를 그리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 대중의 시선은 살짝 턱을 들어 올려야만 그려지는 곳을 향해 있다.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바로 내가 조금 더 부유하게 사는 방향이다. 집단적으로 이 방향으로 움직이려 했던 과거가 몇 번인가 있었지만
그들은 결과적으로 좀 더 촘촘한 층계를 얻었다는 것뿐이지 이동하는데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에게 남은 이동 방향이 나침반의 지침과 상관 없어지게 되면서 우리는 각자의 층계를 마련했다.
물론 대부분은 부(富)의 층계 위에서 땀 흘리고 있을 것이지만, 누군가는 아직 어떤 층계를 오를 것인지 고민 중일 것이다.
또는 몇 개의 계단을 올라보니 다른 계단이 궁금해지기도 할 것이다.
이제 위를 향하는 길밖에 남지 않았지만 자신이 오른 층계의 높이가 행복의 크기와는 관계가 없음을 이해하고 떠나길 바란다.
층계 어디쯤에서 가끔은 인간으로부터 소외된 것을 생각해 주기를.
우리가 어디에 있든 과거의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던 때의 우리와 별반 차이가 없는 존재임을 때때로 생각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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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1
 
흥미에 따라 독서를 한 과정을 잠시 돌이켜보면
미술에서 시작해 미술의 역사와 교차되어온 종교, 과학, 철학의 단편들을 건너왔고,
그 책장들 사이로부터 나에게 종교는 무엇인가 하는 흐릿한 물음표가 따라붙었다.
하지만 내가 아직 그 판단에 착수하지 않은 것은
‘그래도 아직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증거가 있지 않을까?’하는 가능성과
무엇도 진리로 결정 내리고 싶지 않은(가능성으로 남겨두고 싶은) 양자론적(?) 귀찮음과 호기심 때문이다.
 
저 물음표 매달고 다니게 되었던 계기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어떤 사건 때문이다.
그 사건이라는 것은 매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가와 강력한 충격으로 나의 가치관을 뒤흔들었다.
그것은 ‘좋음’이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는 대화에서 출발한다.
지금의 우리가 ‘좋음’의 미덕으로 여기는 ‘인내, 헌신, 희생’과 같은 것들은
과거 중세 시대의 피지배계급에서 확산된 또는 주입된 가치라는 것이다.
시쳇말로 정신승리다.
권력, 부(富),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행동 같은 것은 당시 노예들이 가질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들,
인내와 헌신, 희생을 좋은 것이며 도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사후의 안녕을 위해 좋은 것을 행하고 살아야 한다는 십자가의 그늘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속에서 귀족들은 비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비하한다.
그렇지만 사실 그들이 ‘좋음’으로 규정하는 것들만 가지고 인류가 발전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과거의 ‘좋음’의 덕목들이 현대의 경쟁 사회에서도 여전히 ‘좋음’으로 권장될 수 있을까?
 
위와 같은 가치관의 전복을 통해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사실(진실, 진리)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현상은 해석으로써 사실이 되고, 사실은 시간과 장소,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때문에 내가 아는 사실들은 불안정하다.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지만, 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라는 결론과 함께 허무주의(니힐리즘)가 파고들었다.
완벽주의의 역설이다. 이때 메모한 것이 ‘나라는 종교를 가져보자’(16.11.24)이다.
 
[우리가 믿고 따르던 모든 질서와 가치는 근거가 없다. 따라서 ‘허무’하다.]
 
어제 책에서 읽은 문장이다. 이 말만 두고 보면 허무주의는 무기력하다.
하지만 그 뒤에 니체가 담은 긍정의 메시지가 나의 생각과 닮아 있었다.
 
[세상은 허무하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이 되어야 할지에 대한 정답이 없다면 나는 무엇이 되어도 상관없다.]
 
이 문장을 보고, 그 어느 날 카페에서 썼던 메모가 문득 다시 떠올랐다.
세상엔 어떤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
이미 위에서 보았듯 종교에서 제시하는 좋은, 행복한 삶의 모습 또한 그러하다.
‘나라는 종교를 가져보자’.
스스로를 믿고, 스스로의 양심과 행복을 따라 사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그림 #Nietzsche #Munch_copy #brooklyninstituteforsocial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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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7
 
#본성과 의도에 바라는것
나의 본성은 정직하고, 선한가? 그렇다면 타인은? 인간은?
 
나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선하다고 믿고 싶다는 쪽이다.
명쾌히 단언하지 못해왔던 이유는 그에 대한 반증을 이해하는데 곤란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근본적으로 자비롭고 평화롭다.
 분노와 공격적인 마음이 드는 것은 인간이 지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과 애정을 가지려고 노력했을 때 그런 마음이 일어난다.
 그렇지만 그것은 본성이 아니라 마음의 겉에 잠시 일어나는 것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항상 좋은 결과만 가져다 줄 수는 없다.
다만 그것들이 나에게 올 수 있었던 이유, 나를 관심의 대상으로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좋음’임을 깊은 곳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항상 순수한(선한) 의도로 살길 바란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직 남은 숙제는 순수한 의도가 말이나 글 또는 행동으로 번역 됨으로써 원래만큼의 순수함으로 전달되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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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5
 
#만족하는삶
 
어떤 삶이 나은가? 아니,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1)삶은 원래 고통이며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그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삶
2)삶은 원래부터 공평하고 행복한 것이며, 어떤 고통의 발생은 이상(異常)이기 때문에 그 원인을 찾고 원망하는 삶.
 
1)의 삶은 가난하다. 잘해봐야 고통이 없을 뿐이며, 이 삶의 뒤에서만 행복해질 수 있다.
2)의 삶은 연약하다. 삶 중 고통스러운 일은 항상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인가’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처음 얻은 답은 ‘만족’이 아닐까 질문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하여 달라이라마가 그 위에 동그라미를 쳐준 듯하다.
[자신의 몸 안에, 또는 머릿속에 갇혀 있는 사람은 언제나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만족 할 수 있는가? 언젠가 썼던 문장이다.
‘채우려 해도 채울 것이 없었다. 그래서 만족이라 부르기로 했다.’
[탐욕의 반대는 무욕이 아니라 만족입니다.]
만족에 대한 스스로의 정의를 되뇌다 보면 필연적으로 ‘흔해 빠진 자기 합리화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게 된다.
이러한 자기 의심에서 초탈해지는 과정을 수행이라는 듯 하다.
 
어떻게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 것인가? 나의 문제에 있어서는 행복한 것을 찾고, 타인의 문제에 있어서는 자비로운 것을 찾는 방법이 있다.
[선택의 문제에 빠졌을 때, 그것을 통해 행복과 쾌락 중 어느 것을 얻게 되는 것인가 질문해보자.]
[만족할 줄 알게 됨으로써 친절한 마음과 자비심이 자라고, 분노와 미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대항하는 면역을 가지게 된다.
 마치 질병에 대비하여 육체적인 체력을 키우는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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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

책/독서노트 2019. 10. 11. 15:33
2018.12.22
 
2) “내가 저 사람 보다 나은 사람이기 때문에 더 잘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은
 
1) “저 사람이 나보다 나은 사람이라 나보다 잘 사는 것은 아니다”라는
 
3) 시기심을 합리화 하기 위한 위선이 아닌지, 자꾸 빠져드는 의심
 
4) 이 의심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해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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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독서록 2019. 10. 11. 15:31
2018.11.26
 
어렴풋이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떠올랐다.
그 뒷덜미에 번득이는 느낌은 아니지만 어슴푸레한 광기의 그림자가 어느 한 켠에 눌어 있는 듯 했다.
 
[잠들지 않음으로써 육체에 생기가 돌았다. 
 마지막으로 잠들었던 시간과 멀어질수록 젊고 아름다워졌다.
 무심코 지켜본 잠든 남편의 모습은 섬뜩하리만치 어리숙해 보이고 추해 보였다.
 모두가 죽음으로 빠져드는 시간 사이에서 혼자 깨어있는 낯선 두려움은 까맣게 잊었다.
 그녀의 내면은 고요한 하늘을 유영하며 혼자의 고고함을 한껏 발산하려는 새와 같았다.
 그러다 그 새는 무심코 어떤 두 그림자 사이에 내려 앉았다.]
 
그녀에게 위협으로 다가왔던 두 그림자의 이름은 “깨어있는 시간”과 “잠들어 있는 시간”이라 짐작해본다.
어떠한 표정도 가지고 있지 않은 두 그림자이지만 그녀에게는 똑같은 죽음의 위협으로 느껴졌으리라.
 
- 깨어 있는 시간. 나는 소설의 흐름에서 깨어있는 시간을 생의 소모라는 관점에서 바라봤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심지를 붙잡고 있는 듯, 그녀는 계속해서 잠들지 않고 깨어있음으로
  남은 페이지의 두께 보다 빨리,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잠들어 있는 시간. 잠드는 시간은 깨어 있는 시간의 종말이다.
 다시 눈뜬다는 보장이 없는 잠은 죽음의 시작과 같다.
 혹은 다시 깨어나더라도, 그 사이의 의식의 단절에 의해 잠에서 깨어난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닐 것이라는 불안감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삶이지만 현재의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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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듯 가볍게

책/독서록 2019. 10. 11. 15:30
2018.08.06
 
김도인이 말했다
어떤 방향을 정하고 가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그래도 괜찮다고
하지만 떠도는 것이 아니라 여행을 해야한다고 느낀다.
 
나의 아픔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을 따라가는데
나는 자꾸만 살면서 마주했던 타인의 아픔이 떠올랐다.
 
당신의 큰 아픔과 고단함을 앞으로도 다 이해할 순 없겠지만
그때의 당신이 지금의 나보다 어린 서른 남짓이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애통해서
너무나 애통해서
어떤 위로 조차 꺼내기 힘듭니다.
어느 여름의 난 슬프지 않았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온세상에 개구리가 울어대긴 했지만,
그것은 계절처럼 돌아오지도 않았고 사그라져 이제 없습니다.
그러니 서른둘 즈음의 당신도 슬퍼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사실 그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지만
어떤 대목에서 그 얼굴이 너무도 뚜렷하게 터져나와 버렸다
그 때 너의 표정은 기억나진 않지만
네가 느꼈을 감정을, 왜,
지금 너무 또렷히도 느끼고 있는지, 아니,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때, 미안하다 말했던가.
그것도 기억하지 못해 미안하다.
 
우울증에 관한 대목에서.
단지 ’슬프고 우울한 기분’을 힘들어하는 상태가 아닌,
과거의 기억들, 감당하기 힘든 감정들, 헤아릴 수 없는
생각들이 눈사태처럼 불어나 우리를 덮칠 때 시작되는 것
 
만나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김도인
 
책의 중간 쯤 넘어가다보니 시우가 혹시 내가 아닌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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