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책/독서록 2020. 2. 22. 01:11
나는 마치 작가를 만났던 것 같았다. 그는 좁다란 카페에서 흔히 보이는 작은 정사각형 테이블에 벽을 등지고 앉아 있었고,
나는 껍데기 같은 그 모습을 보다 어설프게 그의 곁에 앉았다.
그의 맞은편 의자는 비어 있었지만 그 자릴 농밀히 채우고 있던건 그의 시선이었으며,
그가 다문다문 입술을 떼며 내는 소리는 빈자릴 향할지언정 내게 하는 이야기였다.
조금씩 그가 ‘너는.. 너는..’이라 말을 이으면 나는 그 장면에서 얼마 못 가 최면에 빠져 버린다.

나는 회색 바지에 하늘색 세로 줄무늬 하얀 셔츠가 어울리던 20년쯤 전, 열여섯, 열일곱의 그 모습이 되었고,
1980년의 5월은 20년쯤 뒤, 그러니까 아마 2000년쯤으로 넘어와,
나는 학생의 모습으로 그 날에 걷던 금남로와 충장로 어귀에서, 천변로를 따라가는 그 길에서 광주를 만났다.
그리고 죽어버린 사람의 아픔과 남아버린 사람의 아픔이 만났다.

책장 위를 까맣게 메운 글자들이 안개꽃송이처럼 보였다. 그래서,
펼쳐든 책은 안개꽃다발이 되었다.
가버린 위로에 국화 보다 안개꽃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겉면에 수 놓인 안개꽃이 깜깜한 밤에 소리를 잡아 먹는 하얀 눈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무던해 보이는 책을 이만큼이나 지독한 열병처럼 힘들게 삼키게 될 줄은 몰랐다.

잡아가지 마요. 잡아가면 안돼요. 소리치는 그녀들을 향해 각목을든 구사대가 달려들었다.
헬멧과 방패로 중무장한 경찰 백여명을, 차창마다 철망이 쳐진 전경차들을 당신은 보았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무장했을까, 얼핏 생각했다. 우린 싸움을 못하고 무기도 없는데. (155p)





Posted by walkingc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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